유학성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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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뉴욕주립대에서 인사드립니다

작성자
김찬수
작성일
2011-11-03 12:00
조회
1217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뉴욕 버팔로에서 글을 씁니다.
많이 늦어젔지만 죄송합니다. 여러모로 한곳에서의 생활을 접고 새로운곳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느라 정신없게 바빴습니다.
지금 저는 뉴욕주립대, 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네개의 매인 캠퍼스중 최대규모인 버팔로 캠퍼스에 2학년 국제경영학(International Business) 전공으로 편입해있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해보면지금 제가 미국에있는 대학교에 재학하고있는것만해도 참 뿌듯해지는것 같습니다.

저는 학군 쎄기로 잘 알려저있는 목동에있는 목일중학교를 다니다가 2005년 9월15일날 말레이시아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비록 지금도 제가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은 아니지만 철없는 중1땐 다른 친구들에게 치이고 학원에 치어가며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학원 봉고차에 실려다니며 살았습니다. 나름 열씸히 했는데 그땐 정말 그렇게 안하는 아이가 없을만큼 과외 열풍이여서 보는 시험마다 평균점수가 높고 워낙 잘하는아이도 많았지만 제 등급은 그냥 평균정도였습니다.

그때 제 영어과외를 해주시던 선생님이 말레이시아분이셨는데 지금은 삼성엔지니어링에 재직중이신 아주 유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과의 과외가 제가 처음으로 외국인을 대면하고 말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나중에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말레이시아라는 나라는 어떤나라인지 궁금해젔고, 어머니가 말레이시아 교육에대해서 알아보시다가 대산유학원 원장님을 뵈게된겁니다. 그후로 답사를 다녀온뒤 유학을 결정하게됬구요, 첫 외국생활을 원장님 댁 홈스테이로 시작하게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처음 미국미국을 와서보니 알겠더라구요. 아무것도 모르는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는게 지금 성인이 되고서도 힘든게 느껴집니다. 말레이시아로 건너갔을때엔 철이없어서 그랬는지 생활이 어렵지 않아서 그랬는지 그냥 다른동네로 온것같은 느낌이였습니다. 같은 아시아국가라 외국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나라도 아니였구요. 전 아직도 첫날이 생각납니다. 처음 원장님댁에 들어갔을 때 동빈이형이랑 영민이형이랑 KFC 치킨을 한바구니 사와서 환영한다고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저의 첫날에대한 기억입니다.

그뒤론 매주 원장님께서 늘어난 홈스테이 식구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맛있는 음식점도 데려다주시고 놀러도 데려다주시고 하셨었죠. 그땐 어릴때라 공부는 흥미없고 형들이랑 같이 놀러다니고 먹으러다니는게 마냥 즐거웠었습니다.
원장님의 권유로 세이폴 국제학교에 7학년 IEP 영어기초반으로 처음 들어가게되었습니다. 제가 교실에 들어갔을땐 한국학생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처음 적응하는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구요, 어려울때마다 친구들이 도와주곤해서 6개월을 무사히보내고 매인반으로 들어갔습니다.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되어 원장님댁에서 홈스테이를 한지 거의 1년 만에 한인타운 암팡에비뉴 쪽으로 홈스테이를 옮기게되었구요, 공부를 그렇게 열씸히하는 성격은 아니여서 7,8 학년땐 그냥 놀면서 보낸것같습니다. 8학년 마지막 학기땐 제 부진한 성적을 잡아주려 제가 태어나기도전부터 직장생활을하신 어머니가 결국 직장을 관두시고 못난 아들을 훈계하시러 말레이시아로 오시게됩니다. 제 8학년 마지막 기말고사때도 성적이 썩 훌륭하지않아 9학년으로 못올라간다는 말을 듣게되었구요, 전 교감선생님이랑 찬드란 한테 이번에 어머니가 한국에서 오셨으니 공부를 열씸히 할꺼란 약속을하고 우여곡절끝에 9학년으로 올라가게되었습니다. 저랑 어머니는 아직도 가끔 이얘기를 하곤합니다. 어머니께선 “그때 엄마가 너한테 안갔으면 지금 너가 어떻게됬을것같니” 라고 저를 무안케하는 질문을 하십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오신다고 당장에 성적이 확오르지는 않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라는건 습관이기때 하루아침에 성적이 좋아지진 않습니다.

과외를 새로 바꾸고 9학년부턴 과목수가 많아지기시작더니 곧 흥미를 갖는 과목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회계학과 경제학, 컴퓨터등이 제 평균을 올려주는 핵심 과목이 되었고, 꾸준한 과외와 어머니의 가름침 덕에 1년만인 9학년 마지막 학기에 평균을 30점 가량 높힐수있었습니다. 그뒤론 잘하는과목 못하는과목이 갈라지고 못하는과목을 깨끗하게 포기하고 잘할수있었던 과목들만 O레벨 시험을 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원장님. 11학년이 끝날때까지 어머니의 고된 훈계와 O레벨시험을 향한 열정덕(?)에 원장님을 찾아 인사드리기가 힘들었습니다.
O레벨은 1월 5월 두번이있지만, 세이폴에선 5월달에 학교에서 치는 것이 룰이였습니다. 하지만 딱 제가있는 11학년까지만이 GCE O레벨이였고 그뒤론 IGCSE로 바뀐다길래 그때 상당히 겁을 먹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시험 시스템이 바뀌면
너네 배운거 다시배워야한다며 겁을주셨고 전 낙제하는 위험을 줄이고자 그나마 자신있었던 다섯과목을 1월에 학교밖에서 100만원씩이나 하는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시험을 미리 보았습니다. 그땐 애들이 미첬냐고 너가 그렇게 공부를 잘하냐고 욕을했지만 두달후 점수가 나왔을땐 상황이 달라젔습니다. 물론 완벽히 준비가 된상태에서 지원을한게 아니기에 점수가 아주 잘나온건 아니였었지만 나름 좋은 점수가 나오고 낙제한과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1월에본 시험을 끝으로 과외를 그만 두게되었고 그렇게 굳은돈이 나중엔 시험지불액 100만원보다 더 굳게되었습니다. 결론은 나름 현명한 판단이였었고 다른아이들이 5월에 있을 시험을 한창 준비중일 때 저는 영어 과외선생님으로부터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루만 해달라는 전화를 받게되었고, 이 아르바이트가 제가 말레이시아에 살면서 가장 보람차고 중요한 경험을 심어준 핵심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거액을 들여서 유학을 온 나라에서 배운 영어를 내가 돈을 받으며 쓸일이 있다는 것 자체에 엄청 감격을하였고 또 이런 기회가 와도 잡을수있게 타이밍을 잘 만든 저와 어머니의 판단에 뿌듯하였습니다. 이 통역알바는 말레이시아왕 사위가 추진하는 하수처리시설장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한국 중소기업들의 기계,장비들의 시운행을 돕기위한 일이였구요, 나중에 이 하루만 하기로했던 통역 알바는 제 일솜씨가 마음에 든걸까요? ㅎㅎ 하루에 200RM지불로 10일동안으로 연장이 되고 그후론 한국 현대중공업에서 수주하는 기계들에대한 설명서와 지침서까지 제가 번역을 하게되었습니다. 이 일은 사장님들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통역과 보좌를 하는일이여서 저도 사장님들처럼 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양식과 일식을 단기간에 그렇게 많이 접해본적은 처음이였습니다. 이일을 하면서 단지 통역뿐이아니고 한국 사장님들이 시키시는 잡일도 병행하며 그외 술자리, 말레이회사 사장님이 초대해주신 엘리트급 인사들(파일럿, 변호사) 의 파티등 제나이때 돈주고도 쉽게 겪을수없는 일들을 많이 겪어 보았습니다. 이날 파티에온 엘리트 인사들을 보면서 “아. 진짜 돈을 왜 많이벌고 높은 일을 해야하는지 알겠다” 싶었습니다.

이중 가장 기억에 남는건 10일 알바중 8일을 일이 끝난후 Bar에 가서 사장님들 나누시는 얘기를 듣고 통역을 하며 1주일을 보내고 그다음날에 바를 방문했을땐 미국 영화에서나 볼듯한 pole dance? 봉춤을 추는 누나들을 여럿 볼수있었습니다. 가죽부츠에 옷을 완전 야하게 입은 누나들이 2M앞에서 기둥을 잡고 춤을추는데 어찌나 그상황이 민망하던지 정말 진짜 처다 볼수가없었습니다. 아 물론 친구들이나 아는사람이랑 왔을때는 모르겠지만 같이 있는 분들은 제 아버지뻘되시고 전부 저만한 자녀가 있으신 어른들이라 제가 뭘해야 맞는건지도 몰랐습니다. 안절부절하며 핸드폰한번보고 창밖 한번보고 누나들 한번보고 정신못차리고있는 저를 말레이측 회사 직원 한분이 어깨를 턱 잡아주시면서 하는말이 “이것도 비지니스의 한 부분이다. 넌 남자고 어른들이랑 같이 있으니 뿌끄러워 할 것 없다”. 전 여지껏 비즈니스나 이런 일들을 교과서 혹은 책에서나 접했지 한번도 이렇게 몸으로 직접 체험해본적이 없었기에 직원분깨서 해주신말은 정말 제 맘에 확 와닿았습니다. 그 명언을 듣고 일을 마친 후론 학업에 대한 정신이 맑게 깨어있는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제자랑 또 하겠습니다 ㅎㅎ 나중에 일이 끝난후에 말레이시아 회사쪽에서 듣게된 말인데 사장님이 저를 보고 흡족해하시면서 “저런 애가 또 없나” 싶어 암팡 코리아타운으로 차를 몰고와선 저 같은 아이가 또없는지 인재(?) 를 물색 하시러도 와보셨다하네요. 전 이 회사에서 취직제의도 세번 받았지만 쿨하게 뿌리첬습니다 ㅋㅋ 한달 월급이 말레이시아 직장인 평균월급보단 훨씬 많은 조건이지만 한국인 월급으로보면 택도 없기에… 처음엔 엔지니어링 졸업하고 오면 받아주겠다 하다가 안하고 비즈니스전공을 할 예정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나중엔 그것도 괜찮다고하셔서 학생 취업난이 심한 요즘 대학 졸업도 안한 애송이의 업무능력을 인정해주시고 탐내주시는것만으로 상당히 감격을 받았습니다ㅠㅠ

학업 외적으로도 말레이시아에서 제가 누린 혜택은 정말 어디에서도 누릴수 없고 앞으로도 그런 기회는 흔치 않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역 번역일을 하며 그때 번돈으론 아들을위해 직장까지 버리시고 희생해주신 어머니께 의미있는 붉은 속옷을 선물해드리고 1박2일 여행도 보내드리고 스마트폰을 사게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스마트폰을 쥐어볼때면 그때의 흥분했던 저의모습을 회상하곤 합니다. 살면서 처음 벌어본 돈이라 진짜 친구들에게 그 싸디싼 나시고랭 한그릇 사주기가 왜그렇게 아까웠던지…부끄러운 제 자랑이지만 이일로 친구들 사이에선나름 능력자 라는 칭호를 얻게되었구요, 다른 친구들이 5월에 O레벨 시험을 칠때 전 세이폴을 졸업 하기도 전에 Inti College로 입학을 하게되었습니다. 학교측에선 출석체크를 해주기로 말을 해놨구요. 하지만 컬리지는 세이폴과는 많이다르더군요… 국가전액장학금을 받고 온애들도 수두룩하고 진짜 보는시험마다 족족 만점가까이나오는 친구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리고 일단 세이폴에선 O레벨을 궁극의 목표로 하다보니 교육이 시험풀이 위주로 이루어지고, 제가 질문을 할게아니면 하루동안 굳이 영어를 쓰지않아도 됬었기에 세이폴에서 는 영어실력은 컬리지 생활엔 많이 부족하다는걸 느끼게되었습니다. 제가 재학중일때의 인티 컬리지는 한국인들이 그닥 많지않았고 한반에 약 두명? 정도만 있었기에 현지 친구들과의 접촉이 더 많았습니다. 첫학기 학점은 그냥 보통이였습니다. 처음이라 많이 걱정하였지만 오레벨처럼 점수가 시험에만 100% 반영이 되는게아니라 퀴즈,과제,발표 등등으로 나뉘게되어 중간중간에 받는 점수들이 나중엔 보탬이 많이 되더군요. 제가 컬리지를 한학기 끝내게 되었을 때 다른 친구들은 컬리지를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친구가 많았지만 인티로 오는 친구들은 한명도 없어서 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싸고 좋은 학교라 만족하며 보냈습니다.

2010년 12월 이명박대통령 말레이시아 국빈방문때 아는분 추천으로 면접없이 기자단지원에 참여할수있게되었구요, 3일동안 또 아주 의미있는 견학을 돈을 받아가며 했습니다. “콧대높은 양반들” 이라는 방송사, 신문사 기자님들, KBS이재원 기자님께서 따라주신 소주잔.. 못마시지만 언제 또 받을수있겠냐는 생각에 들이켰습니다. 덕분에 일하다말고 술먹냐고 같이 일하는 형님들에게 꾸중도 듣고요.
청와대 대통령실장님의 명함을 받으며 “청와대에 놀러오면 연락줘요 구경시켜줄테니” 라는 따뜻한말도 듣게되었구요 (물론 막상 전화드리면 기억못하실것같지만)

나름 말레이시아에서의 제 인생은 축제였던 것 같습니다. 가끔 어머니가 물어보십니다. “넌 한국뜨고 말레이시아간거 후회 안하니?” 이런 말을 들을때면 물론 후회안한다는 말은 하지만서도 한두번 고민을 해봤는데 막상 이렇게 글을 쓰며 회상해보니 절대로 후회할만한 일을 만들어본적이 없고 하나하나 귀하고 자랑스러운 날을 보낸것같습니다. 2년이 되어가지만, 아직까지도 절 받아주셨던 사장님과 꾸준히 연락을 하고있는상태구요, 최근에 또 통역건수가 들어오는 것 같던데 아직 뚜렷한 소식이 없네요 ㅎㅎ 일하면서받은 certificate(봉사활동 증명서) 를 미국 학교 지원할 때 원서와 함께 보내고 지금 그학교 기숙사에서 글을 쓰고있습니다.

최근에 전 말레이시아에있는 친구에게 최고의 칭찬을 들었습니다.
¡°넌 나에게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걸 직접 보여준 첫번째 케이스다¡±.

전 말레이시아를와서 한번도 학업능력이 뛰어난걸로 상을 받아보거나, 업적을 세워본적이 없을정도로 공부에 탁월한 학생이 아닙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 감으로서 제대로 삶에대한 견학(見學), 실지로 보고 그일에대해 구체적인 지식을 넗힐수 있게되었고, 장학금은 못받았지만 그만한 봉급을 받고, 교과서나 어디에서도 적혀있지않은 지식과 경험을 배울수 있었고 제가 어디에 뛰어난지도 알수있게되었습니다.

이 모든일들을 제가 한창 젊고 타오르는 시기에 경험할수있게된것에 감사하고, 훌륭하고 단단한 기둥을 밑에서 받쳐주는 주춧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중1짜리 아이를 단단하게 받쳐주신 원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뉴욕으로 건너왔습니다. 하지만 원장님¡¦ 이곳에 와서보니 저는 진짜 번데기앞에서 주름을 잡은것같아요. 제가 가지고있는 경험보다 더한 경험을 가진사람들이 여긴 수두룩 하답니다¡¦ 더욱 큰땅에서도 제가 빛을 볼수있기를 기도해주세요. 나중에 멋들어진 뉴요커가 되어서 찾아 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원장님. 사모님께도 안부전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