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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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컨설팅을 하면서 나눠드리고 싶은 글들 입니다.

우정은 `Give and Take`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4-20 12:00
조회
468
솜씨도 반응도 신통찮은 글이지만 10년 가까이 쓰다 보니 징크스 같은 게 하나 생겼다.
바로 꼭 한번 써야겠다고 생각해 두었던 내용은 몇 년째 손이 가질 않는 반면 할 일이 없어 장난삼아 끄적거리는 글은 의외로 쉽게 마무리되곤 한다는 것이다.
오늘 쓰려는 ‘우정’에 대한 얘기가 대표적이다.
머리에만 담아놓은 채 훌쩍 2-3년이 흘러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게 뜸을 들이게 된 배경에는 ‘우정’이란 내용을 가지고 괜히 손을 잘못 놀렸다가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게 뻔하다는 부담감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박연차 리스트’를 둘러싼 전임대통령과 가족들의 진실게임을 지켜보며 진실이야 어찌됐건 이 기회에 우정이란 화두에 도전장을 던지기로 한 것이다.
사실 우정에 대한 정의는 행복이나 사랑에 대한 정의만큼이나 무수하고 동서고금을 통해 웬만한 식자들 모두 한마디씩 남겨두었다.

*친구란 두 신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버지는 보물이요, 형제는 위안이며, 친구는 보물도 되고 위안도 된다.
 ─ 벤자민 프랭클린
*언젠가 고독할 때에, 청춘에의 향수가 나를 엄습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학창시절의 우정 때문일 것이다.
 ─ 헤르만 헤세
*좋은 친구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가 누군가의 친구가 되었을 때 행복하다.
 ─ 버트란드 러셀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만이 인생의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 로렌조 그라시안
*다정한 벗을 찾기 위해서라면 천리 길도 멀지 않다.
 ─ 톨스토이

이름만 봐도 숨 막힐 것 같은 대가들도 이럴진대 감히 내가 어찌 토를 달 것인가.
그러나 내가 ‘우정’에 대해 도전장을 내려는 상대는 그 개념적 정의가 아니라 ‘우정’에 대한 우리의 위선적 태도다.
생각해보면 본질이 왜곡된 개념은 ‘우정’말고도 무수하다.
예컨대 ‘민주’니 ‘진보’니 같은 평가적 개념들 역시 언어전쟁과 흑백논리의 제물이 되어 화석(化石)이 된지 오래다.

순수하고 평등하게 출발했던 친구사이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서로 간에 격차가 벌어지게 마련이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그 대표적인 차이가 바로 돈과 권력이다.
실제 초등학교 때까지는 몰라도 중,고등학교에 올라가면 돈 잘 쓰는 애들로 친구들이 몰리고 유유상종이라고 형편이 비슷한 애들끼리 몰려다니지 않았는가.
물론 학교에는 그래도 순수성이 훨씬 많이 남아있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사회에 진출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항공사에 취직하고 나자 졸업 후 생전 연락도 없던 동창들부터 드문드문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전화내용은 대부분 신혼여행을 가야하니 비행기 좌석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해외여행이 제한돼 있어 신혼여행은 오직 제주도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라 주말에 좌석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녀석들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야, 정말 미안하다. 그간 연락도 못하고 이런 일로 전화해서”
그러면 내가 마음을 가볍게 해주려고 대꾸했다.
“임마, 미안해 할 거 없어, 우리는 친구 아이가”
그럼 녀석들은 내가 비아냥거린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럴 때면 이번에는 내가 오히려 그들을 달래야 했다.
“아냐, 정말이야, 서로 부탁할 일이라도 있어야 전화 목소리라도 듣는 거 아니냐”
그리고는 “우정도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라구”

그렇지 않은가.
학창시절도 아니고 강아지들 몰려다니듯 할 수야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솔직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특별한 이슈도 없이 수시로 우정을 확인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의 독특한 정서상 친구사이에 현실적인 격차 그리고 이해관계는 피차가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 불편함을 ‘우리가 남이가’라는 식의집단적 정서로 얼버무리고 ‘우정’에 대한 영역은 신성불가침으로 남겨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와 연관된 시대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흔히 우리에게 우정의 표본으로 회자되는 관포지교도 사회주의적 노동경제시대의 얘기로 화폐경제시대인 요즘에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다.
요컨대 너와 내가 모두 비슷한 형편이라는 평등적 상황과 노동력과 마음으로 주고받던 흘러간 시절의 얘기란 것이다.
그러나 산업사회를 거쳐 국가와 기업이 등장하고 금융자본주의가 꽃을 피우면서 마음과 노동력 대신 화폐가 표현 수단이 됨으로써 우정의 생존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특히 40년 만에 농업국가에서 초스피드로 산업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 우리에게는 오죽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요새 버스 속에서 간혹 듣게 되는 어느 금융기관의 라디오 광고는 절묘하다.

한 친구가 오랜만에 다른 친구로 부터 전화를 받는다.
"야, 오랜만이다 친구야. 한번 만나야지"
그때 상대방에서 미안한 듯이 얘기한다.
"그건 그렇고, 너 돈 좀 빌려 줄 수 있냐"
그러자 얘기도 채 끝나기 전에 상대방인 친구가 즉각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리고 ‘뚜-뚜-’하는 신호음과 함께 금융기관의 대출광고 멘트가 이어지는 그 광고 말이다.

남의 우정에 끼어들기는 뭣 하지만 박연차씨와 노건평씨의 30년 우정이란 것도 비슷한 진화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한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한때 버선발로 맞아주던 친구나 후배들 역시 한, 두 번의 전화통화 이후로는 거의 연락이 없다.
길게는 30년 짧게는 10년 이후로 전혀 다른 세상에서 놀고 있는데다 발톱도 이빨도 다 빠진 내게 무슨 매력이 남아 있겠는가하고 자위를 해보지만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이미 ‘우정은 기브 앤 테이크’라고 스스로 내 발을 찍어버린 마당에 녀석들의 무심함을 탓 할 수만도 없다.

‘우정’,‘친구’

여전히 생각만 해도 그리움이 밀려오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하지만 다른 한구석으로는 부끄러움과 간지러움을 떨치기 어렵다.

그래서 다른건 몰라도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는 에머슨의 말 만큼은 아직도 가슴 한국석에 남아있다.
김선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