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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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컨설팅을 하면서 나눠드리고 싶은 글들 입니다.

박제를 만드는 어른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8-12-06 12:00
조회
418
얼마 전 아이와 함께 말레이시아에 2년간 살다가 서울로 돌아온 어머니가 찾아왔다. 얘긴즉슨 다시 말레이시아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기러기 가족생활을 청산하고 가족이 재회한지 1년도 채 안되어 돌아가는 이유가 자못 궁금하여 물었더니 역시 아이의 교육문제였다.
나는 내심 2년간의 공백으로 국내 아이들과 경쟁에서 떨어져 그런가 하는 의심을 했는데 엄마의 얘기는 그게 아니었다.

즉, 국내 교육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그 한 예로 중학교에 올라간 자기아이의 체육 시험문제를 말해주었다.

문) 다음 중 뜀틀을 넘는 자세 중 옳은 것은 ?
① 두발을 엇갈려 넘는다.
② 팔을 가급적 뜀틀의 가깝게 잡는다.
③.....

단적인 예이겠지만 운동장에 나가서 한번만 해보면 간단하게 끝날 것을 굳이 시험문제로 만들어 평가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긴 나 역시 지난 중간시험에 초등학교 5학년인 큰 아이의 시험문제를 보고 혼란에 빠진 적이 있었다.
우연히 아이의 사회과목의 시험지를 보다 틀린 게 있어 문제를 읽어보니 이랬다.

문) 기상예보에 따르면 올해는 추위가 빨리 온다고 한다. 이 기상예보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
① 어부 ② 농부 ③.....

이 문제에서 아이는 정답을 ‘어부’로 골랐는데 틀렸다고 돼있었다.
‘아니 이게 왜 틀리느냐’며 흥분해서 살펴보니 ④번에 난방업자라는 답이 있었던 것이다.

순간 아이의 경솔함을 탓해야 할지, 문제가 치사하다는 것을 탓해야 할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물론 상대적으로 보아 난방업자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추위가 일찍 오면 어부나 농부 역시 작업량이 줄거나 채소 값이 오를 수도 있으며 개인에 따라서는 그 영향이 난방업자가 받는 것보다 훨씬 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런 식의 문제로 5학년 아이들이 얻을 수 있는 교육적 가치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름대로 상대적 비교감각과 균형을 가르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면 할 말 없지만 내가 어이없어 하는 것은 개인적 가치와 판단이 필요한 문제임에도 주관을 고려할 여지를 애초부터 박탈하는 평가방식이다.
즉, 심하게 얘기하면 네 주관을 버리고 눈치껏 상대적으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 엄마는 ‘중학교에 올라가면 예, 체능 과목까지 학원수업을 하고 밤 12시가 돼야 집으로 돌아온다’면서 나보고도 미리 준비를 하라는 충고를 남기고 며칠 전 다시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이런 상황에 대입에 논술비중이 높아진다고 하니 이번에는 논술 열풍이 불고 있다. 획일적인 교육풍토에서 논술이야 바람직한 일이라지만 역시 문제는 그 습득방법이 또 다시 학원에서 판에 박힌 주입식으로 갈 것이라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겨울방학을 맞아 학원마다 논술과외를 한다는 협박성 광고전단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그 협박이 오죽했으면 우스개 소린지는 몰라도 3살짜리 아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며 논술준비를 하고 있다지 않은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1930년대 요절한 작가 이상의 ‘날개’에서 나오는 첫 대목이 떠오른다.
박제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박제가 된 기성세대들이 대를 이어 우리 아이들을 박제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것도 엄청난 시간과 돈 까지 들여가며.

그래서 얼마 안 있으면 이런 시험문제가 나올 것 같다.

문) 다음 중 가장 행복한 가정은 누구일까 ?
① 40평 아파트에 사는 가정
② 30평 아파트에 사는 가정
③ 20평 아파트에 사는 가정
④ 임대주택에 사는 가정

아니 이미 알만한 애들은 다 알고 있는데 굳이 종이 아깝게 문제까지 낼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김선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