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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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컨설팅을 하면서 나눠드리고 싶은 글들 입니다.

얼마되지않아.. 부끄럽습니다만...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3-04-02 12:00
조회
1014

해외에 나와 산다고 다 근사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차고 올라가는 기분은 잠시고, 끝없는 나락에 떨어지는 비애를 느낄 때도 허다하다.
청운의 부푼 꿈이야 누구나 다 품고 나오겠지만, 과연 몇 사람이나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을까

힘들어서 돌아간 이도 있고, 다른 한국사람 오면 봉으로 생각하고 한탕 하는 사람도 있고, 선교사도 있고, 잘 나가는 사람도 있고, 장사 안 되니 여기저기 돈 빌리는 사람도 있고, 쌀 살돈 없다고 죽는 소리해서 빌려주면 외식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경험상 사기당한 사람은 잘 되는 것 봤어도, 사기친 사람은 결국 계속 허덕거린다는 것이다.

20여년전에 말레이지아에 왔을 때는 교민이라는 게 대체로 보따리장사 수준이었다. 해외투자가 허용되지 않았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중동노무자들이 한국으로 귀국하다 들려서 보니 괜찮은 나라 같아서 눌러앉은 십장들이 있었고, 건설 경기가 좋았으니 현장 함바를 하던 사람이 있었고, 기껏해야 한국식당하는 사람정도가 그럭저럭 자리 잡은 것이었다. 주재원 공관원은 본사에서 월급, 해외수당까지 주니 이 돈이면 물가 싼 나라에서 떵떵거리고 살수 있었다.

그 이후로 20년
이제는 공관원, 주재원보다 더 돈 잘 버는 교민들이 한 둘이 아니고, 골프장 회원권 너 댓개는 기본이고 주재 본부장이 엄두를 못 내는 벤즈 타고 다니는 사람이 늘어났다.

한국인이 말레이지아에 대량으로 들어 온 파도는 82-83년, 90-94년이다.
그리고 지금 2003년에 또 들어온다. 대체로 10년간의 파도를 타고 있는 셈인데,
80년대는 건설경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시공한 세계에서 두번째로 길다는 13Km의 페낭대교, 그 당시만해도 최고층인 54층을 건설한 경남기업, 무슨 고속도로 무슨 주상복합상가등 삼환, 선경, 삼익, 한라, 대림, 대우등 17개의 건설업체가 들어와 있었고, 선술집이고, Pub이고, 가라오케, 사창가는 한국인이 대충 먹여 살렸고, 수많은 밤의 황태자가 탄생했다.
이때만 해도 건설업체는 가족동반이 사치였고, 공사하러 보냈지, 애들과 놀라고 보낸 게 아니라는 게 본사의 방침이었다. 그러니 교민이 많을 수 없었고, 학생도 몇 명 없었다.
미국, 영국 기술자들은 4개월에 한번씩 휴가를 갔는데, 부부가 4개월이상 떨어져 살면 이혼사유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90년대는 제조업과 건설붐 때문이었다.
86년부터 개방한 말레이지아 외국인투자제도 덕분에, 주식을 100%소유할 수도 있고, 땅이나, 건물등 부동산을 외국인이 소유, 매매가 자유롭게 되니, 인건비 저렴하고 영어 잘하고, 물가싸고 인프라 잘된 이 나라가 투자 선호국이 되었다.
단일 공장으로는 삼성그룹에서도 세계최대의 생산량을 자랑하는 삼성의 세렘반 복합단지를 필두로 그 협력업체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주재원은 가족동반이 기본이고, 엄마들이 나왔으니 자녀교육에 열성을 보이기 마련이고, 시어머니, 제사, 경조사 없는 이 나라에 골프치고 놀기 좋고, 더구나 교육환경이 우수하니 한국에 들어가지 말자고 남편을 졸라 주저 앉게 되고,
여러 나라 지사에 나가 봤지만, 물가도 싸고 사람 대접 받으니 얼마나 좋은가.

마침 불어닥친 투자붐덕분에 세계최고층 쌍둥이 건물을 삼성이 건설했고, 대우가 한꺼번에 4개 현장을 갖고 있었고, 대림 현대가 석유화학 공장을 건설하고 있었으니, 한국판이었다.
공장이고, 현장이고 유니폼을 입고 다니니, 폼도 나고 해서, 이 더위에도 현지인들이 작업복 구해 입고 다니는 걸 영광으로 생각했다. 한국회사에 취직하면, 창립기념일에 수건이라도 한장 씩 돌려주니, 이 또한 이 나라에서는 새로운 발상이라, 집에 가서 은근히 한국을 자랑했다.
월급 많이 주어 좋고, 월드컵 본선에 매번 올라가니 약도 오르지만, 자기들의 국기인 축구, 베드민턴에서 한국이 항상 우위에 있으니, 한국인에 대한 위상이 일본인 들보다 나았다.
이 시기에 회사 주재원들이 본사에 돌아가지 않고 주저 앉는 사람이 하나 둘 생겼는데, 100여 가족이 되었다. IMF뒤에는 자의 반 타의 반 독립하여 더 늘었다.

2000년부터 아름아름 들어오기 시작한 유학생들이 지금은 불어나고 있다.
한국교육에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말레이지아 교육환경이 좋다는 것은 여기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대체로 다 수긍하고 있고, 그 친척 친구들이 우리애도 봐달라는 식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애들을 들들 볶지 않아도 영어는 물론 중국어, 골프, 수영, 피아노등을 비싸지 않게 가르칠 수 있다.
“한국에서 우리 애는 3년을 개인교습 받았기 때문에 여기서 잘 따라 갈 겁니다.” 하는 부모들의 바램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한국에서 하는 영어연수는, 강사나 학생이나 다 한국인이거나, 강사는 Native Speaker라 해도 학생은 전부 한국인이니 실습을 할 수 없고, 자기 입으로 실습을 하지 않으면 자기 말이 될 수 없는 게 외국어이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외국에서 1개월 연수는 한국의 6개월에 버금 간다고 한다. 그러니 비행기표 계산 해도 싸니 여기로 나오는 것이다.

“말레이지아가 영어를 쓰는 나라인지 몰랐어요,”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수준으로 알았는데, 선진국이군요.”
“잠간 휴가 내서 교육환경이 어떤가 보러 나왔는데, 친구들한테는 뉴질랜드 갔다 온 다고 나왔습니다. 말레이지아에 간다면 비웃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는 게 초행자들이 한결 같은 소리이다
대부분의 비즈니스 출장자나, 여행객들은 말레이지아 영어를 못 알아듣겠다, 영어도 아니다, 영어를 베리겠다고 한다. 유엔사무총장, 월드컵사무총장 발음은 본토발음인가.
여행객들이 듣는 영어는 시장 바닥이나 음식점 종업원한테서 들은 얘기일 텐데, 미국/영국 시장바닥 영어는 우아한 영어인가,
비즈니스 출장자들은 자기가 쓰던 영어와 다른 영어를 만났으니, 못 알아들을 수 밖에 없다.
영어종류는 100가지가 넘는 다고 하는데, 그들은 몇 가지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미국에서 영어를 배우고 미국사람 하고만 얘기하면 언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 없겠지만,
살다 보면, 자기가 배우지 않은 영어도 만나야 한다. 싸움판이 벌어졌는데, 상대방이 가라데 폼을 잡았다고, 유도 폼을 잡았다고 도망가서야 되겠나,
말레이지아에서는 한 30가지 영어를 접할 수 있다. 교실에서 배우는 영어는 다 표준영어이다.
문제는 알아 들어야 뭔 답을 할 수 있을 텐데…
여기 교민들 자녀들이 사회에 나가서 어느 누구와 만나도 두려움이 대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영어를 들어 왔기 때문이다.

얘기가 좀 빗나갔는데,
글케, 그렇게 정착한 한국인이 다 잘 살고, 교육 잘 시키는 것은 아니다.
말이 안 통하고 비즈니스관행이 다르니 돈 버는 게 원래 힘들 수 밖에 없다.
그저 성실하게 좀 손해보면서 살지 하는 사람도 있고,
사업이 안 되서, 사기 당해서등등... 애들 한인학교 보낼 돈이 없는 사람도 있다. 한인학교는 주말학교라 월2만원이 수업료인데… 부모 마음은 오죽할까. 자기애 사랑하지 않는 부모 이세상에 있을까. 남들처럼 좋고 비싼 학교 보내고, 이것 저것 예체능과외 시키고 싶지 않은 부모 있을까.
그래서 한인학교에는 장학생 제도가 있다. 부모가 애들 몰래 와서 신청서를 쓰면 된다. 여기저기서 독지가들이 기부를 해주니, 학교재정에 타격을 주지 않는다.
문제는 한인학교를 못 다닐 정도니 주중에 가는 국제학교는 무슨 돈으로 보내겠는가.

한마음 장학회
“피치못할 사정으로 아이들 진학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우리가 한인사회에 조그마한 씨앗을 심는다는 아주 소박한 마음으로…
그저 돈을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따뜻한 만남을 통해, 사회의 따뜻함도 함께 가르치는 활동도 하고 싶기에 한마음 장학회를 발족하였읍니다.
여러 화원들의 조그마한 정성이 이루어져, 우리 어린이들이 밝고 명랑하게 자라서 우리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큰 일꾼이 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나아가서 우리가 살고 있는 말레이 자녀들을 위하여도,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이 되겠읍니까 우리들은 많은 분들의 따뜻한 참여를 바랍니다.”

발기회 최송식회장님(www.come2malaysia.com)의 인사말씀이다.
“한인학교 장학금은 제가 어떻게 걷어 볼 테니까, 주중에 학비는 회장님이 좀 구제 좀 해주십시오”,
“알았어”
“별 도움도 안주면서 생색낸다고 욕먹으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십시일반으로, 음성적으로 운영되다 소문 내고 모금한 게 1년이 지났다. 대단한 활동을 한 건 아니지만, 장학금 받은 집에서 좀 생활이 피니, 장학금 기부하는 사람도 생겼다

“얼마 되지 않아, 부끄럽습니다만…일시적으로 힘든다고 애들 학교 안 보낼 수 있습니까, 다 지원해드릴 수는 없지만, 나중에 형편 피면, 장학금 좀 내주시고요”
최회장님이 장학금 전달할 때 하시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