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 칼럼

운영자 칼럼

교육컨설팅을 하면서 나눠드리고 싶은 글들 입니다.

교장임기를 마치고(1) “더러워서 나간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4-06-04 12:00
조회
396
6년간 임기를 마치면서,
다음 번에 맡는 분들이 훌륭한 봉사를 해주시고,
학부모님들의 큰 아량과 관심으로 더 나은 학교로 발전하도록 기록을 남겨볼까 합니다.
그 동안 적어 놓았던 메모장을 넘겨 가다 보니 긴 얘기가 될 것 같아서 몇 편에 나눠 올릴까 합니다.

말레이시아 한인학교는 1974년 현지 Fatimah유치원을 빌려서 유아반(9명) 초급반(26명) 상급반(7명) 중/고반(10명) 52명의 학생으로 출발했습니다.
“조국을 떠나 생활식, 언어 등을 달리하는 환경 속에서 결여되기 쉬운 학생들의 국가관과 국민 정신을 배양하고 한국 교육과정에 따른 기초 및 기본 학력향상을 도모함으로써 자랑스러운 한국인 육성을 교육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 교육부 산하에 등록이 되었으며 대사관의 지휘 감독을 받는 학교입니다. 연간1억5천만원 예산 집행하고 550명의 학생과 30명이 교사가 재직하는 세계 최대 주말한인학교 입니다.

한국학생면 누구나, 주중에 국제학교를 다니던 현지학교를 다니던 주말에는 한인학교에 나와서 한국어를 잊지않도록 하고, 또한 한국으로 전학 가서 진도를 따라 갈 수 있도록 한국교과서를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곳이며, 교민이면 누구나 다 한인학교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제성이 있는 학교는 아닙니다. 학적을 인정해주지도 않고 매일 가르치는 곳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사자격증이 있는 선생으로 교사진을 구성한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자격증 있고 경력있는 교사로 교사진을 구성하겠습니까 전공이 틀려도 경력이 있으면 모셔서 봉사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봉급이라고 해봐야 교통비조로 월12만원정도 주고 일주일치를 하루만에 다 가르치라고 하니, 또한 결석한 학생에게는 전화도 해서 다음에는 꼭 나오라고 채근도 해야 하니, 깍쟁이 같은 교사는 몇 번 나오고 쉽게 사표 던지는 곳입니다. 봉사도 누가 알아주어야 하는 건데 옆집 아줌마로 인식이 되지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학부모도 별로 없었습니다. 다 여자 교사이고 교장만 남자이니 모르는 학부모들은 꽃밭에서 논다고 놀리곤 했습니다. 꽃밭이라고요, 제가 처음 부임해서는 여선생님들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에어컨도 없으니 땀이 나는 거지만, 천장이나 벽만 쳐다보면서 교무회의를 주재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사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뚫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교수법이나 학과목에 대해서 왈가불가 했다가는 국물도 없습니다. 하기야 교사로서 자긍심이 없으면 땀 흘려 가면서 누가 봉사하겠습니까

교장임명은 학교운영위원회에서 하는데, 학부형회의를 만들어 교사들이 학업에 전념하도록 학교행정과 대외업무를 도와주는 게 운영위원회입니다. 그때만 해도 교민들이 별로 없었고, 대기업진출이 두드러진 시기라, 삼성 대우 현대 LG 대한항공 대사관 코트라 한인회 대표 그리고 자영업자 대표로 운영위원회가 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자영업자로서 유일하게 자영업대표로 들어가 있었는 데, 위원회의 중요한 업무가 학비인상여부, 교사월급 조정 및 교장임명 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장만 제대로 임명해 놓으면 위원들은 속 편하게 위원행세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장이 몇 년째 공석이다 보니 교사들의 요구를 직장에 얽매어 있는 위원들이 들어주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교실이 부족하다, 책걸상이 없다. 교과서가 도착하지 않았다. 교사가 부족하다. 임대해 쓰고 있는 학교주인이 나가라고 한다" 등등 이었습니다. 위원들 모두 현업에 바쁘고, 특히 주재원들은 가뜩이나 실적 맞추기가 힘든 데 학교일에 관여하고 있다면 본사에서 고운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역대 교장선생님들의 면모를 보면, 말레이지아 교환교수거나, 말레이대학생들이 한국으로 교환학생으로 갈 때 부족한 과목을 가르치러 파견된 고등학교 교사들 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다 교직을 천직으로 갖고 계신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언젠인지, 모르나 교환교수도 없고, 교환교사도 없어졌습니다. 계신다고 해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교장은 못하겠다고 하니 공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운영위원회에서는 교장을 오랫동안 물색했지만, 넘기고 넘기면서 교무주임체제로 운영하고있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운영위원회가 체면을 지키겠다고 덜커덕 저를 교장으로 임명해버렸습니다. 그것도 비겁하게 제가 한국출장 간 사이에 말입니다.오래 살았고 사범대학을 졸업하여 교사경험이 있으며, 어쩌구 저쩌구…

"해외에서 구멍가게 하면서 주말에 골프 치는 낙으로 사는 건데 주말에 학교에 매어 있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냐" 한국노래방기계를 동남아에 팔아보려고 조그만 노래방을 동업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노래방 주인이 교장질 하겠느냐"고 한달간 버티다가 전폭적인 지지를 해줄 것이며 임기는 2년이지만 1년씩 돌아가면서 하자는 꼬임에 빠져 자신이 부족한 줄도 모르고 거룩한(?) 자리를 맡았습니다.

지금 새로 들어오신 학부모님들은 이런 게 학교라고 할 수 있느냐고 불만과 실망이 많으시겠지만, 6년전에 비해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부임했을 때 학생수는 약350명 초등학교는 Good Shepherd, 중고등학교는 거기서 차로 10분거리의 Fairview 국제학교를 임대해서 쓰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초중고등학생들이 Good Shepherd에서 같이 가르쳤는 데 학생수가 늘어나다 보니 중고등학생은 오후반으로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어컨이 없는 교실이다 보니 오후반은 교실이 한증막이라 중고등학생만 Fairview컨테이너교실을 쓰기로 하고 분리해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교실이 부족하니 강당을 4등분하여 막아서 쓰고 있고, 유치부는 복도에서 하고 있으니 이교실에서 저교실로 책걸상들고 다니는 것이 1교시 풍경이고, 4인이 사용하는 교무실을 10명의 교사들이 교무실이라고 사용하고 있으니, 교장 자리는 당연히 없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교장자리는 서 있는 곳이 교장 자리입니다.
학교가 떨어져 있으니 초등학교 교무회의 하자마자 중고등학교로 이동해서 교무회의를 주재해야 했습니다.
이게 제가 부임한지 한달 동안 보았던 풍경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복도를 지나다 교실을 들여 다 보니 교사들이 돈을 걷고 있었습니다. 교과서 복사본을 사는 학생들에게 걷는 돈이었습니다. 교과서가 부족해서인지 알아보았더니, 교과서가 도착하지 않아서 복사해서 팔고 있다는 것입니다. 학기초에 교과서가 한국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1학기는 5월경에 2학기는 11월경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과서를 복사해서 나눠줄 수밖에 없는데, 어느 학생은 교과서 원본을 부모가 한국에서 공수해주니 복사한 교과서를 사겠다는 학생들에게만 그 만큼 복사해서 복사비만 받고 팔고 있었습니다. 돈을 받지 않으면 복사본을 사지 않는 학생에게는 불공평하다는 이론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수업료도 담임교사가 걷고 있는 것입니다. 1주일치를 하루 만에 가르치는 것도 시간이 부족한데 그 없는 시간에 수업료 받느라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이었습니다.

“학교재정이 모자라면 모금을 해서라도 채울 테니까 교사들은 일체 수업료나 교재비를 받지 말 것”이라고 지시를 해놓고 대사관으로 쫓아 갔습니다. 세상에 교과서도 제때 공급 못해주고 어떻게 교육시키라고 하는가 다음학기부터는 학기시작 전에 갖다 주지 않으면 당장 그만두겠다고 엄포 놓으니 그 다음부터는 제때에 교과서가 학생수에 맞춰서 도착했습니다.
또 심각했던 것은 교사들의 공공연한 지각이었습니다. 수업시작 종이 친 후 한참 뒤에 출근하는 교사들이 몇 분 계셨습니다. 상습적입니다. 결근도 잦으니 합반하고 교무주임은 대강 들어가고 하니 한 학기에 한 담임선생에게 배우는 반이 별로 없었습니다.
같은 교사가 작성한 커리큐럼으로 흐트러짐이 없이 해도 교육이 될까 말 까 하는데 결근하고 지각하니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같은 교사신분인데, 또한 급료도 별로 주지 못하면서 교사들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뭐라고 싫은 소리하면 그만 둘 것 같아서 입니다. 가뜩이나 모자라는 교사인데 그만두면 제가 수업에 들어가야 할 판이었습니다.
방법은 한가지였습니다. 아침 일찍 교문에 서 있는 겁니다. 학생지도가 목적이 아닙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오늘은 일찍 출근하셔서 고맙습니다.”

거기까지는 내부적인 문제라 몸만 조금 피곤하면 해결되는 사항 이었는데,
수시로 위에 불려가는 게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언덕 중턱에 학교가 있고, 언덕 위에 성당이 있고, 그 옆에 수녀관이 있습니다. 학교는 수녀관에서 관리하는 것인데, 학교담당 수녀님이 호출하는 겁니다.
지난 주에 유리창 몇 장이 깨졌고, 2년 전에 교실문짝이 파손된 것은 언제 변상할 것인가, 재봉실습실에 기물이 파괴 되어서 실습에 큰 지장이 있다는 것, 어떻게 가르치길래 학생들이 이 모양이냐, 책상에 낙서하는 것도 가르치느냐, 이제는 성모상도 깨고, 이제는 더 이상 임대해줄 수 없다. 나가라는 얘기였습니다.

사실 우리 학생들이 토요일마다 한인학교에 나오는 데 그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 풀기에는 한인학교가 최고로 적당한 곳입니다.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성적에 구애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말로 다 통하니 일단 학교에 오면 짓눌렸던 감정이 폭발하는 곳입니다.
“아하 이런 일들이 있으니 교장 하다가 그만두는 거군”
그러나 부임해서 1년도 안 되었는데, 저의 재임기간에 쫓겨났다는 수치감등으로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선물도 들고 올라가고, 알량한 지식으로 설득도 했습니다. “잘못한 사람들이 성당에 와야 하듯이 문제 있는 학생들을 학교에서 안받아주면 어디서 교육받을 것이냐, 애들은 애들 아니냐” 라고 설득 반 읍소도 했습니다.

결국 3개월 뒤에 나가라는 최종 통보를 받고, 성모상을 지나 학교로 내려오는 길에 담배 한대 피워 물고,
“그래 더러워서라도 나간다” 고 작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