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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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컨설팅을 하면서 나눠드리고 싶은 글들 입니다.

할아버지의 똥지게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5-14 12:00
조회
496
한동안 해외에 나가있느라 중단됐던 의무활동을 재개했다.
이 나이에 국방의 의무도 아니고 교육의 의무도 아닌 그것은 바로 한 달에 한,두번 씩은 반드시 부모님과 처가를 들러야 하는 자식의 의무 말이다.
가만있으면 중간이라고 갈 텐데 여기서 내가 굳이 의무라는 표현을 써서 싸가지 없는 놈임을 자처하는 이유는 아무리 위선을 떨어도 70-80대 노인들과 주말을 보내는 게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란 점이다.
물론 부드럽게 자식된 도리니 동방예의지국이니 하는 말로 우회할 수도 있겠지만 왠지 낯간지럽다.

솔직히 생각해보라.
올해 86세로 밭일이 낙이신 아버지나 중풍으로 쓰러지신지 20년이 넘어가는 장인영감과 깨가 쏟아질 공통의 화제가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자네 왔나’하는 건조한 인사만 건네고는 별 말없이 스포츠 중계에 몰두하곤 한다.
그리고 스포츠 중계가 없는 날이면 기껏 화제를 꺼내봐야 아이들 얘기나 노무현이나 이명박을 씹는 것 외에는 달리 없다.

내가 그럴진대 이제 중학생인 아들놈들은 오죽하겠는가.
노인들이야 친탁을 했건 외탁을 했건 그저 손주새끼들만 보면 싱글벙글이지만 아들 녀석들도 머리가 커지면서 더 이상 예전의 아이들이 아니다.
그래서 주말에 할아버지네 간다고 하면 예전처럼 표정이 밝지 않고 집에 가서도 의무적으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각자의 관심사에 몰입한다.

그런 애들을 데리고 지난번에는 모처럼 아버지의 유일한 놀이터인 텃밭에 나가보았다.
예상치 않은 우리의 방문에 기가 오르신 아버지는 "이번 여름에 너희들이 좋아하는 옥수수는 내가 책임진다"고 하시면서 연신 "몇 포기나 심을까"하고 우리에게 물었다.
내심 "그냥 적당히 알아서 심으세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장단 맞추기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내는 연신 "아버님 맛 있겠네요“, ”아버님 많이 심으세요"라며 분위기를 띄웠다.

아내의 그 추임새에 문득 고등학교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할아버지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밭’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래서 주택가 한복판에서도 비어있는 땅만 보면 우리가 싼 화장실의 똥을 푸고 씨를 뿌렸다.
하지만 당시 학생이던 나는 할아버지가 똥지게나 물지게를 나르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그까짓 상추 몇 포기 시장에서 사다먹으면 될 일을 창피하게 이게 뭐냐"고 외면했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우리 가족 모두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머니만은 달랐다. 며느리의 도리때문인지 아니면 모성본능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말벗이었고 이따금 "너라도 할아버지를 도와주라"는 간절한 부탁으로 할아버지의 똥지게를 마지못해 대신 지기도 했다.
그러면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네가 효자다"라고 하셨지만 오히려 그 얼토당토않은 "효"라는 말에 반항심과 짜증을 부리곤 했다.

말이 나온 김에 얘기지만 나의 아버지는 결코 효돌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로도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똥지게를 대신 지기는커녕 두 분이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거나 하다못해 겸상을 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식사 때마다 사랑방에 혼자 계신 할아버지에게 작은 반상을 들여놓는 것도 내 몫이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글줄이나 읽고 나름대로 개화된 사람이라고 으스댔지만 오직 장남, 장손만 아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사람이었다.
그런 할아버지를 큰 아버지가 일찌감치 돌아가시면서 둘째인 우리 집에서 모시게 된것이다. 그것도 여섯 명의 고만고만한 자식들과 한 집에서.

하지만 할아버지는 몸은 우리 집에 계시면서도 돌아가실 때까지도 작은 집인 우리에 대한 차별은 쉽게 버리질 못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6.25 직전 할머니를 북에 남겨두고 홀로 남하하신 할아버지는 어찌보면 같이 빈 몸으로 내려오신 아버지 형제들에게는 애물단지셨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불편한 수컷들 사이에서 올해 84세 이신 어머님만이 양쪽의 비위를 맞추느라 바삐 움직이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는 똥지게로 해방되는 듯 했다.
특히 어머니의 해방감은 남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버지가 조금씩 밭에 대해 관심을 보이시더니 급기야 할아버지가 했던 그대로 빈 땅만 보면 화장실의 똥을 푸고 씨를 뿌렸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집에 남은 어머니는 그 뒷수발을 감당해야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죽은 네 할아버지와 왜 그리 똑같이 궁상을 떠는지....아이고 지긋지긋해"하며 자신의 처지를 푸념하시곤 했다.
그리고는 내게 "너는 제발 저렇게 살지마라"고 하시곤 했는데 나 역시 그때마다 "그럼요, 저는 다릅니다"하며 다짐을 하곤했다.

이제 내 아버지는 손수 키운 상추나 쑥갓으로 손자들이 먹는 모습을 보는 걸 지상최대의 행복으로 삼는 속 좁은 노인이 되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모든 생산능력이 끊긴 이 땅의 늙은 남자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사냥터는 땅밖에는 달리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땅에서 키워낸 수확물로써 새끼들을 멕이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대를 이은 두 분의 밭에 대한 집착은 궁상이 아니라 삶의 의미다.

1시간 쯤 시간이 흐르자 지루해진 아들놈들과 나는 서서히 몸을 뒤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내는 흩날리는 봄 꽃 사이로 오래전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늙은 시아버지의 말벗을 해주느라 밭고랑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생각해보니 33년 전 83세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올해 86세인 아버지가 판박이처럼 느껴졌다.
또한 당시 50대 중반 이었던 아버지는 지금의 내가되고 내 어머니는 아내의 전신(前身)이었다.
그리고 똥지게를 메고 투덜거렸던 나는 아들녀석들로 대체된 셈이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새삼스레 인생의 단순함에 전율이 느껴졌다.
순간 “그렇다면 20년-30년 후 나 역시 똥지게는 안지더라고 내 아버지처럼 아들과 그 자식들을 위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늙은 남자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그랬던 건가.
그날따라 밭에서 풍기는 거름냄새가 싫지만은 않았던 게.

아, 어느새 5월의 중반이다.

김선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