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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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컨설팅을 하면서 나눠드리고 싶은 글들 입니다.

형님과 오빠들의 천국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1-08 12:00
조회
448
좀 의아하겠지만 얼마 전까지 우리집에는 TV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신념의 소유자거나 특이성격일 것이라는 오해는 말라. 그저 여기저기 자주 옮겨살다 보니 상황이 그랬고 한동안 해외에 있느라 국내방송과는 담을 쌓고 지내다보니 별 불편함을 전혀 못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중학1,2학년이 되는 아들녀석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과 대화가 안된다며 TV를 사달라고 졸라대더니 내 반응이 없자 주말마다 무한도전이니 1박2일이니 하는 프로그램을 보러 친구 집으로 동냥을 다니곤 했다.

그러다 TV를 들여놓고 부터는 아이들은 물론 나 역시 거실만 나오면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표현대로 ‘한국의 TV를 틀면 이쪽은 유재석이요 저쪽은 강호동’이라는 사실을 매일매일 확인하며 바야흐로 수다공화국이 도래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거기다 요즘 들어서는 나이든 중견연예인들마저 등장하는 것을 볼 때면 쉬는 시간이면 입담경쟁을 벌이던 내 고등학교 시절과 대화수준을 연상하곤 한다.
돌아보면 나 역시 그 경쟁에 한 축을 이룬 것은 물론 아예 내가 있는 전철칸으로 통학하던 친구들이 모일 정도였다.

아무튼 아이들이 TV를 볼 때마다 나 역시 연예인들의 재담에 같이 생각없이 깔깔거리다가 문둑문득 방송의 공공성과 오락성에 대해 혼란스런 생각이 든다.
지난년말에도 방송사마다 경쟁적으로 내보냈던 연예인들의 시상식을 보면서 마치 방송사와 연예인들의 학예회장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긴 내가 어릴 때도 이기동이니 배삼룡이니 하는 코미디언들이 우리의 우상이었고 매년 말 가수왕이 누가 되느냐가 국가적 대사였으니 새삼스럽게 고상한 척 하기는 어렵겠다.

하지만 오락성이야 그렇다 쳐도 그들끼리 부르는 ‘호동이 형’, ‘효리 언니’라는 식의 호칭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떨치기가 어렵다. 거기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연예프로그램에 아나운서나 PD들까지 가세하여 방송은 가히 형과 오빠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따지고 보면 이는 연예인들만의 현상이 아니다.
우리의 이른바 형님문화는 실로 조폭집단에서부터 기업체 학교집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오죽했으면 청와대내에서도 운동권 출신끼리는 형이라는 호칭이 다반사 였다지 않던가.
이런 마당에 누군가 ‘형’하고 어리광을 부리는데 ‘내가 왜 당신 형이야’라고 정색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과문한 탓인지는몰라도 내가 아는 한 가족이 아닌 타인에 대해 형이나 오빠라고 부르는 나라는 우리나라 외에는 없는 것 같다. 아마 유달리 혈연의식이 강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겼던 한국식 유교의식의 산물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게 우리의 오랜 전통이라고 그냥 넘기기에는 의혹이 남는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방송에서 형이니 언니니 하는 호칭은 거의 들어보질 못했다.
그리고 조선시대까지도 갈 것 없이 조금 나이든 어른들의 얘기를 들어봐도 형, 오빠를 지금처럼 남발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부터 대학가부터 살금살금 퍼지더니 지금은 마치 마당발식 인간관계와 힘을 나타내는 과시수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형이라 부르든 오빠라 부르든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러나 이런 끈끈한 호칭속의 이면에 숨어있는 패거리와 어리광 문화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싯점이다. 요컨대 우리의 무분별한 호칭문화가 나이, 직급을 떠나 독립적인 주체로써의 합리적인 인간관계를 가로막고 어리광과 떼쓰기의 단초를 제공하지 않나 하는 점이다.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형님,아우 하며 곰살궂던 여야의 정치인들이 정치적 이해가 얽히면 언제 봤냐는 식으로 살인적인 독설을 퍼부으며 싸우는 모습을 보라. 또 한 쪽에서는 연예인들과 어울려 형,오빠 하던 프로그램을 시도때도 없이 보내다가도 광우병이다 미디어법이다 하는 이슈에서는 안면을 바꿔 전투적 냉소모드로 돌변하는 방송권력들을 보면 우리의 형님문화가 또 다른 계급과 차별을 만들고 위선으로까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때면 몇 년전 말레이시아의 한 골방에서 읽었던 공자님 말씀이 떠올라 혼자 고개를 끄덕이곤 하는데 바로 이 대목이다.

어느날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고 한다.
‘위나라의 군주가 선생님을 모셔다가 정치를 하려 한다면,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아시다시피 공자는 끝없이 현실정치에 뛰어들려고 했지만 번번이 좌절을 겪었던 사람이니 만큼 자로로서는 공자에게서 뭔가 크고 화려한 대답을 기대했던 것 같다.
이윽고 공자가 대답하였다.
이름을 바로잡는 일 즉 정명(正名)을 먼저 할 것이다
이에 자로가 크게 실망하여 되물었다.
‘아니 선생님도 참 아둔하시네요. 그 많은 일을 놔두고 왜 하필 이름을 바로잡는다고 하십니까?’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뭐 였을까.
그게 기막히다. 나와는 개인적으로는 악연이었던 공자를 다시 생각케 하는 대목중 하나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어지러워지고, 말이 바르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고....결국 원칙이 무너지고 백성이 갈데가 없는 것이다
(名不正則言不順, 言不正則事不成, 事不成則禮藥不興....)

형님도 좋고 아우님도 좋지만 정작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경제도 일자리도 아닌 이름을 찾는 일이다.
그래야 내가 하면 로맨스요 네가 하면 뷸륜이라는 식으로 찢고 뭉개버린 국민, 민주, 진보, 수구, 보수, 공영, 언론등 헤아리기조차 숨가뿐 그 이름들의 본 뜻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김선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