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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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컨설팅을 하면서 나눠드리고 싶은 글들 입니다.

이배재를 넘으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8-12 12:00
조회
437
"살받이 터 총안 앞에서 젖은 군병들이 얼어 있었다.
바람에 무너진 가리개들이 흩어졌고 물 먹은 거적이 나뒹굴었다.
손에 창이나 활을 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군병들은 두 손을 제 사타구니 사이에 넣고 비비며 언발을 굴렀다.
젖은 발을 구를 때마다 빗물이 튀었다.
소나무 위로 기어 올라간 자들은 얼어 죽었는지 두 다리가 늘어져 있었다"
- 김훈 ‘남한산성’ 중에서-



장마가 끝나고 바로 가을로 넘어가려는 건지 날씨가 아주 청명합니다.
오전에 경기도 광주에서 볼일을 보고 고개를 넘어 남한산성을 돌아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광주에서 성남으로 넘어가는 고개중 하나가 바로 이배재입니다.
평일이라 더 그랬겠지만 명색이 수도권인데도 차량이 한적해서 모처럼 운전이 즐거웠습니다.

이배재
이배란 의미는 한자로 二拜 즉, 절을 두번 한다는 의미입니다.
조선시대 강원도나 삼남지방에서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올때 바로 이 고개에 서서 고향을 향해 한번, 임금이 계신 한양을 향해 한번 절을 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요 아마.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평범한 고갯길에서 나는 김훈의 남한산성이라는 소설을 생각했습니다.
1636년 청의 침략으로 남한선성으로 들어간 임금 인조와 대신들간의 40여 일을 그린 소설말입니다.
이미 칼의 노래에서 접한바지만 역시 현존하는 최고의 문장가라는 수식이 아깝지 않다는 사실을 재 확인했습니다.
책의 근간을 이루는 역사적 사실은 충분히 알려진 바라 사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가상의 인물인 대장장이(이름이 뭐였더라)와 뱃사공의 딸을 내세워 민초들의 질긴 생명력으로 희망을 주려는 저자의 배려가 안쓰러우면서도 여운을 남겼습니다.
바로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서 전국 각지의 군졸과 의병을 불러모으려고 밀사를 맡은 대장장이가 넘던 고개가 바로 이 이배재였습니다.
남한산성을 빠져나와 이배재를 넘으면 광주의 너른 평야가 나오고 강원도와 충청도로 갈라지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나는 역으로 광주에서 이배재를 넘었습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남한산성의 줄기는 참 당찹니다.
특히 한강쪽에서 바라다 보면 마치 전라도 영암의 월출산처럼 평야 위에 우뚝솟아 위압감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내가 정작 남한산성이란 소설을 추억하는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바로 병자호란이라는 민족최대의 수치를 당한때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그 혹독한 시련을 경험한 때로부터 불과 40년의 차이라는 겁니다.
즉, 7년에 걸쳐 전국의 반이 초토화되고 국민의 30% 이상이 총칼에 맞아죽거나 굶어죽은 전란속에도 끈질기게 사람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살아남은 왕족과 대신들 그리고 백성들은 채 40도 안되 꼭 같은 일을 당했다는 것이지요.
임진왜란의 그 참혹한 형상은 칼의 노래에서 기막히게 그렸지 않았습니까.
여담이지만 돌아가신 노무현대통령도 탄핵때 그 소설에 심취했었다지요 아마.
어, 그래서 그런지 미안해 하지마라, 원망도 마라, 운명이다라는 노 대통령의 마지막 유언도 매우 흡사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조선왕조의 무력함에 열이 뻗쳤고 역사는 반복한다 사실이 지금의 현실과 겹쳐 섬뜩했습니다.
정녕 역사는 반복하는 것인가. 아니 역사란 사람들의 기록이니 인간사는 반복한다는 표현이 맞을겁니다.
토인비가 얘기했던가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사라진다고.
혹시 모르겠습니다.
김훈씨가칼의 노래를 발표하고 그 다음으로 남한산성을 택한 것에 깊은 의미가 있을는지도.

이배재를 넘어 성남을 가로지르니 송파입니다.
엄동설한에 인조가 중신들과 함께 청의 홍타이지의 군막 앞에 맨발로 나가 3배9고두(三拜九叩頭 : 세번 절을 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찧어댐)의 치욕을 당하던 장소가 바로 송파 삼전도 아닙니까.
생각해보면 학교다닐때 선생님들로부터 이 병자호란의 치욕스런 얘기를 들을때면 오랑캐에 대한 적개심이 솟곤 했는데 지금은 왠지 무덤덤합니다.

시내가 가까와 오며 차가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라디오를 켜고 뉴스를 들었습니다.
1년 전, 3년 전, 10년 전 20년 전에도 듣던 그 뉴스아닌 뉴스가 또 흘렀습니다.
대리투표, 장외투쟁, 노사 극한대립, 정권퇴진, 민생안정
아니 거슬러 올라가면 100년 전, 400년 전에도 같은 뉴스가 흘러나왔을 거라는 생각에 다시한번 역사의 반복과 민족의 운명을 생각했습니다.


김선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