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 칼럼

운영자 칼럼

교육컨설팅을 하면서 나눠드리고 싶은 글들 입니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아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7-20 12:00
조회
424
다른 곳에서도 언급했겠지만 나는 중2, 중1인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고 있다.
그리고 특별할 것도 없는 그 사실이 종종 주위에서는 화제가 되기도 한다.
대신 영어, 수학 그리고 과학만은 내가 도움을 주지만 나머지는 스스로 공부하도록 하고 있다.
혹, "학교를 졸업한지 언제인데 어떻게 중학 2학년짜리 수학을 가르칠 수 있냐"고 하는이도 있지만 문제를 자세히 읽어보면 그다지 어려울 건 없다.
사실 도움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를 직접 풀어주기보다는 아이들의 질문에 대해 “문제를 다시 읽어보라”거나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식으로 안내만 해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행히 영어, 수학, 과학은 상위권을 유지하지만 나머지 암기위주의 과목은 아직 형편 무인지경이다. 하지만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암기과목이야 때가 되면 저절로 이해하게 될 것임을 아니까.

그렇다고 아이들과 수학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이 나로서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안풀리는 문제를 갖고 스트레스 받고 혼자 갑갑해 하는 아들놈을 두고 볼 수만은 없기에 50이 넘은 나이에 집에 돌아와서도 피곤함 몸을 추스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의외의 수확도 있다.
"도대체 아이가 답답해 하는 문제의 근본적인 이유가 뭘까"를 생각하다보니 새삼 수학의 중요성을 절감하며 때론 내가 근 40년 전에 가졌던 궁금증이 풀리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예컨대, 1차 방정식의 그래프에서 절편을 설명할 때 학교다닐때 생각없이 받아들였던 그 절편의 절이 한자로 끊을 절(切)이라는 점. 나아가 먹는 떡의 절편역시 길게 나오는 떡을 끊는다고 해서 절편이라는 것까지 덤으로 이해하게 됐다.
또 등식에서 양변의 위치를 바꾸면 부호가 반대가 되는 당연한 공식역시 막상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려다 보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려면 등식의 등(等)이라는 한자의 정의부터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런 점에서 가르치는 게 최상의 배움이라는 말을 절감하곤 한다.

그런 한편으로는 과연 학교 선생님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란 의문도 든다.
사실 내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점이다.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자립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볼 때 학원에서 하는 성적올리기 찍기형 수업방식이나 선행학습은 자칫 자립심을 빼앗는 악영향을 미칠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리고 학교 교사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들의 자질 역시 그다지 미덥지 않기 때문이다.
핑계같지만 나름대로 동네 산수박사였던 내가 도시의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유달리수학에 취약했던 것이 물론 나의 아둔함이 결정적이었지만 선생님들의 부족한 실력과 무성의한 강의도 한 몫 했을 것이란 원망을 줄곧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과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아이들을 이해시키고 가르치는 문제는 더욱 높은 차원이 아닌가.

그러던 차에 어제 한 신문칼럼에서 결정적인 기사 내용을 읽게 됐다. (동아일보 7.17일)

어느 고등학교의 이사장이 교사를 구하기 위해 지원한 교사들에게 해당과목의 수능시험을 보게 했더니 수학, 물리과목 교사의 대부분이 50점 미만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충격과 함께 내가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던 의문이 일시에 풀리는 시원한 느낌을 경험했다.
즉, 알지도 못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니 당연히 학생들의 질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주입식으로 밖에는 안 되었을 거라는 의문.
그리고 자존심도 없이 교사들이 "너희들 이건 다 학원에서 배웠지"하며 스스로 교육을 포기하고 사교육에 끌려가고 있는 이유를.
나아가 어릴때에도 어렴풋이 감지됐던 일부 불성실한 나의 스승들이 어떻게 진급은 승승장구하게 됐는지 말이다.

대학은 어떤가.
비록 70년대 학번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대학교육은 중고등교육보다 더 엉망이라는 게 내 경험이다.
이에 대해서 80이 가까운 이어령 교수가 70대 초반쯤 했다는 고백이 떠오른다.
한국의 대표적 지성이라는 그 양반도 30대까지 학생들을 가르친 걸 돌아보면 “나도 모르는 걸 학생들도 모르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법률용어로 보면 일종의 사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40대쯤 들어 겨우 알기는 했지만 그것도 결국 학생들이 이해하건 말건 오직 자기가 아는 것만 가르쳤다”고 하면서 “50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나도 알고 학생들도 알 수 있게 가르치는 진짜 교육자가 됐다”는 고백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직장생활은커녕 치열한 알바경험도 없이 달랑 박사학위를 딴 백면서생의 교수님이 ‘인사조직론’을 가르치고 ‘마케팅’을 가르치는 것이 애시 당초 한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실전경험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경쟁도 평가도 없는 철밥그릇 속에서 사회에 진출할 우리에게 경쟁을 가르치는 자체가 모순이다.
그렇다고 학생들 역시 초,중,고 내내 질문하나 제대로 할 수 없던 일방적 분위기에 하루아침에 대학생이 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저 고등학교의 연장선상이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교사나 교수들 역시 그렇게 주입식으로 배웠을테니 그들만을 탓 할 수 만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그 기자 역시 교사들의 실력저하의 원인으로 경쟁도 없고 평가도 없는 우리교육계의 현실을 지적했다.
그렇다.
경쟁없는 발전은 다 같이 잘살자는 공산주의 이론만큼 허망하다.
창의력과 경쟁력을 키워줘야 할 교사들이 정작 자신들 만은 한사코 평가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아이마저 사교육에 맡기고 있다면 그건 코미디이거나 위선이다.
나는 전교조든 아니든 간에 교사들의 무능력보다 그 위선이 더 두렵다.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말라고 교사라는 직업은 존중하되 만약 그 그림자의 주인이 위선이라면 확실히 밟아줘야 한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그리고 그들의 자존심을 위해서도 말이다.
교사도 스승이기 전에 똑 같은 직업인이요 집안의 가장, 그리고 아이를 기르는 부모들이 아닌가.

비록 한 개인의 경험을 그것도 신문을 통하여 주워들은 내용으로 신성한 교직을 모독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간 내가 품어왔던 많은 궁금증을 푼 기사였다.

김선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