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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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컨설팅을 하면서 나눠드리고 싶은 글들 입니다.

동무들의 우정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0-12-21 12:00
조회
1017
동무들의 우정


매번 하는 얘기지만 될 수 있으면 눈감고 넘어가야 하는 주제가 몇 개 있습니다. 친일,민족,보수,진보와 같은 개념도 그렇고 우정이나 의리니 하는 감성적인 주제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마치 한비자 세난편에 나오는 용의 목에 거꾸로 돋아난 역린(逆鱗)과 같아 될 수 있으면 다른 이들과 적당히 묻혀가야지 자칫 잘못하면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그럼에도 제가 또 우정이라는 역린을 건드릴 수밖에 없게 된 연유는 이렇습니다.

엊그제 느지막이 출근하는 길에 낯선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상대방은 제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자기 이름을 대며 오랜만이라고 했습니다.

‘김 XX

순간 빠르게 머릿속 검색엔진을 회전시켰습니다.

‘말을 놓는걸 보니 학교동창인가, 아니면 입사동기 그것도 아니면 군대동기’


그러나 분명 낯익은 이름이었지만 끝내 레이더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이름은 익숙하지만 전혀 매치가 안된다고 하니 상대방은 자신을 내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했습니다. 뿌연 기억속으로 어렴풋이 앳된 얼굴이 하나둘 나타났지만 여전히 선명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자 내 머리는 더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졸업후 3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마주친 적도 생각해 본적도 없는 녀석이 전화를 한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혹 부모님이라도 돌아가셨나
아니면 갑자기 동창회라도 하겠다는 건가

동창은 그간의 소원함을 미안해하며 자신이 사업을 하다 망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더니 부탁하나 들어달라고 했습니다.

“시사잡지를 1년만 구독해 줄 수 없냐"

추측과는 완전히 빗나간 전화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난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의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전중인데다 당황한 마음에 다시 통화를 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고 나자 우정이라는 역린을 건드리고 싶은 유혹이 떠나질 않았던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정이라는 주제로 다른 칼럼에서도 여러번 썼듯이 우정을 유지하는 데는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매일 모여야 하는 학교생활이나 직장생활과 같은 환경적 매개체든 아니면 돈이든, 권력이든 주고 받을 수 있는 현실적인 매개체 말입니다. 물론 우정은 이 두가지 조건을 뛰어넘는 숭고한 가치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가 상실되면 우정은 더 이상 존속할 근거가 사라지는 게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입니다.

15년의 개인사업과 낭인생활을 끝내고 귀국하면서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로부터 심심찮게 연락을 받게 됩니다. 전화상으로는 반가운 마음에 하루라도 빨리 만나자며 곧 달려올듯 하지만 실제 달려온 놈은 거의 없습니다.
그건 역으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반가운 친구라도 생각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해 1-2시간 걸려 친구의 사무실을 찾고 또 집까지 먼 거리를 되짚어 오기에는 에너지가 약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수지타산이 맞질 않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는 장소는 예외 없이 상가집이거나 결혼식장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막역했던 과거의 우정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처음에야 학창시절로 돌아가 공동의 화제로 소란스럽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문제가 화제에 오르기 시작합니다.

“요즘 뭐 하니”
“집은 어디야”
“애들은 어느 학교 다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은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고는 이내 자본주의 신분질서에 따라 몇 개의 소그룹으로 재편되고 종국에는 흐지부지 흩어지기 일쑤입니다.
사실 세계최고의 기업인 삼성과 현대의 사장이나 최고위 임원을 하는 동창과 당구장이나 노동판을 전전하는 실패한 동창과의 대화가 오래 갈 수가 있겠습니까.


얼마전 지방 강연을 다녀오다가 서울외곽의 동창과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IMF 당시 지은 빌딩이 100억대를 호가 하면서 녀석의 화제는 줄곧 골프와 지역사회의 이권문제나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모임 얘기였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자기네들끼리 만나면 어떻게 애들에게 재산을 물려 줄 것인가가 관심사라며 자칫 연애결혼 한다고 집도 절도 없는 가난한 놈과 결혼하겠다면 골치가 아프니 형편이 비숫한 회원들끼리 사돈을 맺는 게 안전하다는 논리였습니다. 일부 대기업들 임원들끼리 인턴사원과 취업을 품앗이 한다는 얘기나 같은 맥락입니다.
부자동창이 사준 점심을 맛있게 먹기는 했지만 그와 내가 다시 만나 나눌 대화가 거의 없음을 서로가 직감했습니다.

요컨대 동양에서는 유유상종이요, 서양에서도 새도 같은 깃털끼리 어울린다(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고 하지 않습니까.
마누라들이 동창회만 갔다오면 부부싸움을 한다는 우스개 소리를 백번천번 이해합니다.

여기에 경조사는 물론 매사에 봉투가 동원돼야 하는 우리 문화는 우정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계산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얼마 전 경조사만큼은 꼬박꼬박 챙기기로 유명한 재벌그룹사 고위임원인 친구에게 가까웠던 후배의 모친상에 가자고 했더니 단호한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자식, 그동안 남의 상가에 한 번도 얼굴을 비친 적이 없는데 갈 이유가 없다”

순간 그 얼마 전 자신의 그룹회장 상가에서 발인때까지 사흘 밤을 꼬박 새웠다며 목소리를 깔던 녀석의 얘기가 대비되었습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뤄도 정작 정승이 죽으면 상가집이 한산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너무 속물이라고 욕하지는 마십시오.
저보다 딱 100년 전에 태어나 당시로서는 이단아 취급을 받던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1858-1918)도 돈의 철학이라는 명저를 통해 돈이 신념을 변화시키고 삶의 문제를 구매에 대한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멀리 갈것도 없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고 춘추시대의 관중도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倉廩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고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맹자의 성선설은 벌레처럼 혐오스럽지만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는 말만큼은 금과옥조와 같습니다.

어찌보면 우리의 우정이란 개념은 딱 동무시절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동무라는 말이 순수한 한글인지 한자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몰라도 한자로 만들어보면 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습니다.

‘동무(同無) 또는 동무(同務)’

즉, 계급이나 빈부격차가 없거나 같은 일을 한다는 의미 말입니다.
어린시절 동무들 간에는 부모의 지위와 재산은 천차만별이었겠지만 계급도 가진 것도 없는 무산계급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동무라는 말을 차용한 것도 이유가 있는겁니다.

‘위원장 동무, 사장동무, 지도자 동무’

하지만 공산당들의 ‘동무’라는 호칭도 결국 위선으로 드러나며 대부분의 공산국가가 붕괴되었듯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유산계급이되고 더이상 평등상황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욱이 세계 최빈국 농경제 중심의 유교문화의 장유유서 질서에서 초고속 자본주의 선진국으로 진입한 우리에게는 오죽 하겠습니까.
그래서 동무였던 과거가 오히려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우정과 의리를 표방한 거래만 살아남게 되는거지요.

이쯤 되면 ‘한국인의 우정과 자본주의 논리’라는 제목의 논문 한편쯤 나와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마치 막스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논문을 가지고 기독교와 산업화의 갈등에 휩싸인 독일의 상황을 정리했듯이 말입니다.

아, 벌써 12월입니다.
조직도 없고 휴먼네트워크도 빈약한 저에게도 동무들로부터 모임을 알리는 전화가 옵니다.

우정 !

아름다운 말이지만 어떤 대상에도 서열을 매기고 도식화시키는 문화적 기반에서 본래의 우정은 이미 그 존재기반이 무너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애시당초 신기루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정에 관한 공허한 수사들 중에도 에머슨의 이 말만큼은 끝내 가슴에 남습니다.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겁 없이 또 우정이란 역린을 건드렸는데 무사할지 모르겠습니다.

주) 역린지화(逆鱗之禍)
"용의 비늘을 건드리지 말라" 중국 전국시대의 법가 책 "한비자 " 의 (세난) 편에 군주에게 유세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을 설명하면서 " 역린지화" 라는 말을 소개 하고 있다.
“용은 상냥한 짐승이다. 가까이 길들이면 탈 수도 있다. 그러나, 턱 밑에는 지름이 한 자나 되는 비늘이 거슬러서 난 것이 하나 있는데, 만일 이것을 건드리게 되면 용은 그 사람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만다. 군주에게도 또한 이런 역린이 있다."
그러므로, 이 말에 연유하여 군주의 노여움을「역린(逆鱗)」이라 한다.

김선엽